이경래 신부 칼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선물(다해 부활4주일)
작성일 : 2022-05-08       클릭 : 27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508 다해 부활4주일

사도 9:36-43 / 묵시 7:9-17 / 요한 10:22-30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선물

 

 

돌아가신 분 소식을 듣고 장례예식에서, 특별히 입관예식을 할 때, 저는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쳐다봤던 저 눈, 우리와 이야기했던 저 입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미동도 없군요. 우리 한 가운데 누워있지만 우리와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네요.” 이렇게 망자와 살아있는 우리들 간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단절의 벽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음 외에도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뇌나 심장이 멈추었을 때 어떤 고통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을 때, 혹은 치매에 걸렸을 때 우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보면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구나하는 감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반응변화라는 요소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어머니와 대화할 때, 현재보다 과거에 갇혀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주위와 반응하는 법을 서서히 잊어 가는 것과 반비례로, 과거의 특정한 시점에 갇혀서 그 일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는 빈도가 증가합니다. 치매로 인해 반응과 변화라는 생명의 활동이 점차 사그라지면서 아무런 반응도 변화도 일으킬 수 없는 단절된 상태에 갇혀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치매의 무서움을 느낍니다.

오늘날 의학기술은 인간생명 연장을 위해 장족의 발전을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과거보다 수명도 많이 늘었나고,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속도를 늦추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엔 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를 키워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삶의 모든 과정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부활의 복음이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복음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죽음이 있었기에 그 치열한 죽음과의 사투를 뚫고 나온 값진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거나, 거짓 의연한 체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심각성을 피하지 않고, 그 앞에서 몰려오는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너머를 봐야 합니다. 그 너머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하느님이 계시듯이 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 안에서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 들어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라는 여신도를 소생시키는 기적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께서 야아로의 딸을 살리시고(마르 5:35-43),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요한 11:17-45) 기적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도 스승님과 같이 소생의 기적을 베풉니다. 스승 예수께서 나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성부 하느님께 기도하셨듯이, 그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스승께서 망자에게 일어나거라라고 하셨듯이, 그 역시 일어나시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부활의 은총입니다. 그럼 도대체 부활이 뭐 길래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요? 부활절부터 토마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 이야기를 통해 강조했듯이, 부활은 그분이 우리를 새롭게 부르심을 뜻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 혹은 우리의 힘이 다 소진되어 더는 응답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은 우리를 다시 찾아오셔서 새롭게 살리십니다. 그 부르심, 그 살리심은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생명이 끊어진 도르가를 다시 살리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도 하고, 베드로와 바울처럼 인생이 온전히 바뀔 수도 있고, 토마처럼 철저한 불신에서 온전한 신뢰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죽음과 처절하게 싸워 이겨낸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이제 세상을 이긴 예수께서는 그 부활의 선물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라(요한 10: 24)”고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들어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와 연대의 끈을 절대 놓지 않으실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를 굳은 결기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려는 그 근거는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는 강렬한 일치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성부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음이라는 단절과 고립에서 건져 내시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긴 이 부활의 선물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베드로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역시 스승님처럼 도르가를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이처럼 우리를 더 이상 고립과 단절이라는 공포를 초월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직면할 용기를 줍니다. 더 나아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과 새로운 차원의 연대와 일치로 들어간다는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에 살면서 부딪히는 곤경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의 말씀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어떠한 위로를 주시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원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 옥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도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묵시 7: 14, 17)”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주간 전례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 예수님을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혔는지 들었습니다.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성부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죽음을 피하게 하시리라는 희망조자 내려놓았습니다. 이처럼 지옥과도 같은 죽음과의 사투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그분은 다시 일으켜 지셨습니다. 마침내 모든 단절과 죽음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승리는 다시 살아난 삶,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생명이 더 이상 활기가 없을 때, 인간관계가 끊어져 시체처럼 싸늘해졌다고 느낄 때, 개인이나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어떤 면에선 죽은 것처럼 과거의 관행 속에 갇혀있을 때, 우리는 그 너머에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그분께 자비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하느님이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죽음과의 사투에서 건져주셔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셨듯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관계, 나아가 우리사회와 문화를 새롭고 신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지키시려는 당신의 양떼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의 기도를 들어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원하며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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