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다해 부활5주일)
작성일 : 2022-05-15       클릭 : 28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515 다해 부활5주일

사도 11:1-18 / 묵시 21:1-6 / 요한 13:31-35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성공회나 천주교와 같은 전례력이 있는 서방교회는 가해, 나해, 다해로 된 개정 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에 근거하여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 , 다해로 나눈 것은 가해는 마태오, 나해는 마르코, 다해는 루가로 복음을 낭독하고, 부활 절기는 가, , 다해 모두 요한복음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서로 닮은 점도 많고 공통된 관점이 있다는 뜻인 공관복음(共觀福音)’이기 때문이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는 예수님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더 신학적이고, 더 영성적인 성찰이 담겨 있어서 부활시기에 봉독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올해 연중절기에는 루가복음을 읽지만, 부활 절기에는 요한복음을 낭독합니다. 또한 제1독서는 평상시에는 구약말씀을 읽지만, 부활절기만큼은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다해인 올해 부활시기에는 제2독서로 요한묵시록을 읽으며 역사의 종말, 다시 올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합니다.

올해 부활절기 동안 우리는 사도행전과 묵시록 그리고 요한복음을 들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련의 말씀을 통하여 부활이란 단지 예수님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적과 그에 대한 찬양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가져 온 파급효과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다. 그 효과란 막달라 마리아를 기뻐하게 했으며, 아무도 믿지 못했던 토마를 믿음의 사도로 바꾸었고, 베드로를 사랑의 목자로 변화시켰으며, 박해자 바울을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우리 인생을 놀랍게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묵시록에서 하느님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5)”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모든 시간과 역사를 완성하시고, 공간과 세상을 새롭게 재창조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알파(A)요 처음이신 창조주 하느님이 바로 오메가(Ω)요 마지막이신 완성자 하느님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획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이며, 이로써 우리는 예수부활의 은총으로 영원할 것만 같은 낡은 세계, 늙어서 소멸하는 생명,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마침내 새롭고 정의롭게 재창조될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인생과 역사를 낙관적으로 대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의 가치관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회심은 정신만이 아닌, 우리의 물질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변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1독서를 봅시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성령체험을 한 신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이 소식은 유다인을 넘어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해져서 그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다른 민족들은 유다인과 풍습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지켜왔던 율법과 종교관습을 다른 민족한테도 강요해야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커다란 정신적 혼란에 직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돼지고기 먹지 말아야 한다, 남자는 태어나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종교법으로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길 시, 그들은 하느님께 커다란 죄를 짓는 거라고 배워서 이방인들에게도 죄를 짓게 해선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초기교회 지도자인 베드로는 기도 중에 주님의 환시를 봅니다. 그 환시 중에 하늘에서 유다인이 먹어선 안되는 짐승들을 주시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심지어 하늘에서 주신 음식인데도 부정한 음식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 11:9)”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세례를 줄 사람들에게 가보니, 고르넬리오라는 이방민족 집이었습니다. 그들도 기도 중에 베드로한테 세례를 받으라는 음성을 듣고 모셔왔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역사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그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사도 11:17)”

마침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役事)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인들 만의 종교가 아닌,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열리는 첫 막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그 은총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기잡이 어부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은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회심의 길로 이끄십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 사랑으로 부르시는 회개, 그리고 오늘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좁은 사고방식을 확장시키시는 정신의 회개로까지 부르십니다. 이처럼 회개 혹은 회심의 영역은 실로 넓고도 깊습니다. 그럴수록 회개의 열매도 베드로 한 사람의 변화에서 주변사람에게로까지 혜택이 퍼져갑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은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교(宣敎)’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살인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등의 구약의 십계명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훨씬 근원적인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입니다. 이 계명은 너무도 단순하여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도 모두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께서 고린토 전서 13사랑의 찬가에서 노래하셨듯이,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가실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다교의 십계명을 능가하며, 하느님의 본질로 더 깊이 들어가는 진정한 그리스도교 율법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정보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신 신()이시니 마땅히 찬양받아야할 분이라는 차원에서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당신이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나타나시지도, 그리고 굳이 성령까지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감사할 지점은 예수께서 당신에게 일어난 이 놀랍고 엄청난 사건과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 선물을 받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후반부에서부터 사도행전, 바울의 편지들은 모두 이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묵시록에서는 영적환시를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더 후세의 시대, 즉 역사의 종말에 가서 모든 인간, 모든 생물, 온 우주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부활하는 거대한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죽을 때 다 살았다하듯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하느님도 마지막에 이제 다 이루었다(묵시 2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 사람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의 단초를 연 부활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를 낳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통과하여,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벽히 이루어지는 역사의 끝이라는 종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부활주간 전례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신앙의 선조들과 지금 우리들, 그리고 장차 우리를 이을 후손들까지 이 거대하고 도도한 부활의 신비 속에서 함께 지내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닌, 우리의 부활로 함께 기뻐할 수 있으며, 그 부활의 은총이 나를 변화시켜 주길 간구하면서, 나아가 나도 언젠가 종말의 시기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초대받는다는 희망의 기다림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매일매일 새롭게 만들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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