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마르타와 마리아 간의 건강한 통합을 위하여(다해 연중16주일)
작성일 : 2022-07-17       클릭 : 23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717 다해 연중16주일

아모 8:1-12 / 골로 1:15-28 / 루가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간의 건강한 통합을 위하여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생활방식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직장생활하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것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늘면서 이제는 직장과 가정이라는 공간의 이분법이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건을 사고, 음식을 사먹는 것도 최근엔 온라인거래가 오프라인거래 못지않게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과거처럼 물리적으로 모여서 일하고, 물건을 사고, 식사를 하는 방식 못지않게 흩어져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비대면으로 접촉하는 방법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시대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자주 모이고, 많이 모이는 것이 신앙의 척도, 교회사목과 선교의 지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교회건물을 크게 지어야 하고, 교회에서 하는 각종 신앙집회도 많은 신도가 참석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신앙집회를 잘 인도하고, 우렁차게 강연하는 목회자나 사역자들이 각광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애찬봉사, 차량운행,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많은 봉사자의 손길을 필요로 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마르타교우님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교회는 물리적인 공간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활동하고, 애찬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목자들, 사역자들, 교인들은 사목과 신앙생활에 혼란과 위기가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활동을 많이 하면 그것이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선교하는 거라고 확신하였는데, 코로나로 인해 그러한 기존의 사목과 선교의 도구들을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교회의 사목자들과 교인들은 길을 잃어버린 마르타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마르타와 마리아이야기는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 계기를 줍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마르타와 마리아 집에 묵습니다.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 분들 집에 가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마르타가 주도적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걸로 봐서 마르타는 참 적극적인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손님들을 잘 대접하기 위해 음식준비며, 잠자리 준비며, 그 밖에 여러 가지 시중으로 눈 코 뜰 수 없을 정도로 바삐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손님으로 집 안에 초대한 예수님과 일행들은 집 안에 방치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다행히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손님들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문도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연스럽게 두 자매는 손님접대 역할분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손님시중으로 정신없는 마르타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께 와서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루가10:40)”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 10:41-42)”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이 대목을 근거로 마리아를 기도로, 마르타를 활동의 상징으로 대비시키면서 기도와 정신적인 영역에 있는 마리아를 활동과 물질적인 영역에 있는 마르타에 비하여 우월하고 더 가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철학의 영향 그리고 고대와 중세 신분제 사회의 계급관념이 가미된 왜곡된 관점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성경해석은 오랫동안 교회의 사목과 우리의 영성을 잘못 인도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타의 활동이 마리아의 경청 또는 기도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마르타에게 당신을 초대했던 초심(intention)을 잃지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마르타는 집 밖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러한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싶어서 자기 집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집에 모시고 나서는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하다가 그만 밖에서 받은 그 감동은 사라지고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리아가 밉기도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원래 바램을 동생이 꿰차고 있는 것에 대한 질투가 생겨서 본인의 내적평화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남에게 투사하는 마르타에게 너에게도 평화를 있기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마르타의 이런 모습은 교회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보다 큰 영광을 드리자고 시작한 교회 내 단체들의 선한 활동들, 복음을 전하자고 시작한 훌륭한 선교활동들이 그 시작은 마르타처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저런 이유와 사연으로 서로들 자꾸 비교하게 되기도 하고, 활동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려 그것에 못 미칠 때 상호갈등이 생기게 되면서 처음에 기쁘고 감사했던 마음은 점차 사라져가고 어느덧 우리가 지금 뭐하고 있지?”하는 회의감이 몰려옵니다. 그럴 때 공동체 안에 마르타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과거 교회가 활동하는 마르타보다 기도하는 마리아가 더 가치 있다고 가르치다 보니, 교회활동을 하다가 어려움에 봉착한 많은 마르타들이 커다란 정신적 혼란에 빠집니다. 과연 마르타와 마리아는 화해할 수 없는 걸까요? 둘 사이에 균형을 잡고, 더 나아가 통합된 온전한 신앙인, 건강한 교회는 불가능한 걸까요?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에는 두 가지 훌륭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 속에 관상(Contemplatio in Actione)’입니다. 전자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영성이고, 후자는 예수회의 영성입니다. 529년 베네딕트 성인이 세운 베네딕트 수도원은 조도, 만도와 같은 공동기도와 전례를 통해 기도하는 마리아 정신과 각자의 역할에 맞는 노동이라는 마르타 정신 간에 조화를 추구합니다. 특히, 영국 성공회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영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중세가 끝나가고 근대가 시작될 무렵인 1539년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설립한 예수회는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바탕으로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모든 활동을 하느님을 관상하는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기에 선교와 사목도 하느님을 찾는 과정이고, 학문탐구와 세속적 활동도 하느님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섭리 안에 성스러움과 속됨은 나눠지지 않으며, 그러기에 활동과 기도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은 기도하는 마리아와 활동하는 마르타를 별개로 보지 않고 조화롭게 균형을 잡으면서 궁극적으로는 통합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통합할 수 있을까요?

먼저, 듣고 보십시오. 여기서 주체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입니다. , 내가 원하는 것을 듣고 보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이 뭔지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발치에서 주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자처럼 주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다음으로, 일상 활동 중에 이러한 마음을 의식하며 유지하십시오. 이것은 마리아의 마음을 갖고 활동하는 마르타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일상 속에서 활동하면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이 일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영광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 의식에게 물어보십시오. 만일 마르타가 이런 내적습관을 몸에 배었다면 내적평화를 잃고 동생에게 역정을 내기 보다는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고 흐뭇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골로1:24)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사도바울처럼 교회의 일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각자와 우리교회 모든 단체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자신 안에 건강하게 통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내가 아닌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몸에 익히면 일상 속에서 불편한 상황이 올 때, 내 생각과 감정이 먼저 나가기에 앞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기도로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의 지혜를 불어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초대한 우리가정, 우리교회는 더 화목하고 행복한 곳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모두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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