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잃었던 자연을 찾아(다해 연중24주일)
작성일 : 2022-09-11       클릭 : 20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911 다해 연중24주일

예레 4:11-12, 22-28 / 1디모 1:12-17 / 루가 15:1-10

 

 

잃었던 자연을 찾아

 

언젠가부터 뉴스시간에 자연재해에 관한 소식이 자주 나옵니다. 몇 십 년 전부터 남극과 북극,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고, 아마존의 밀림이 점점 없어져 간다는 뉴스는 이제 하도 들어서 어느덧 우리는 별 반응이 없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올해만 해도 유럽, 미국, 중국의 일부지방은 극심한 가뭄과 고온으로 강바닥과 호수가 마르고 있고, 이와 반대로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지역은 엄청난 홍수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만에 온 최악의 가뭄, 최악의 홍수라는 뉴스의 헤드라인은 매년 들어서 새로운 소식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이상기후를 겪으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서서히 예전의 자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잃었던 양 한 마리와 잃었던 은전에 관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1독서 예레미아서에서 예언자는 망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내다보고 속이 타고 슬픔이 밀려오는 고뇌에 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잃었던 그리고 잃어가고 있는 모습에 대한 하느님의 애통함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시대 가장 심각하게 잃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이 제일 애통해 하실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구에 있는 생명들과 하느님 당신이 창조한 이 푸른 지구가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드셨지만, 그것은 우리만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을 갖추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을 만드시고, 또한 낮과 밤도 만드시고, 그리고 바다와 하늘과 땅에 온갖 생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즐거워하시면서 당신의 모든 작품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정성과 얼이 담겨있는 축복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인간은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의 힘만을 탐구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더 큰 세계관, 즉 별과 식물과 다른 모든 생명체를 포함한 보다 큰 우주 공동체라는 안목을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간만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는 관점 때문에 지구가 망가지고 있고, 다른 생물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향후 15년 안에 적어도 50만종의 생물이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과 은전에 대한 비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오늘 복음을 설교할 때, 많은 신부님들은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윤리적 측면에 초점을 둡니다. 그것은 만일 내가 길 잃은 죄인이라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하고, 또 만일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선을 권면하여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구절에 대하여 인간의 윤리생활 개선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과거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듯이, 오늘날 인간은 지구상에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더 나아가 광대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존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약 46억년 동안 지구가 축적한 다양한 자원과 경험과 유산을 불과 몇 백 년 만에 고갈시켜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무생물과 생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성이 하나씩 끊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단지 그 한 마리쯤 없다고 왜 그리 호들갑인가?”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관점인 유용성이라는 잣대로만 볼 때, 아흔 아홉 마리를 놔 누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나선 목자가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적이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목자는 그 한 마리로 인해 아흔 아홉 마리도 없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현명한 예언자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 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하느님이 맡기신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지 않고, 자신들만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나라가 기울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온 몸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예언자는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염통이 터집니다. 나팔소리 나고 싸움터에서 아우성소리 들려와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예레4:19)” 예레미아 예언자가 이와 같이 그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느끼면서까지 그랬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의식이 누구보다 민감했던 것이요, 그 민감성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염병보다도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보통 자기중심적 존재들입니다. 하물며 우리들도 그럴진대 일반백성의 어려움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왕이나 권력자들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들에겐 공감능력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감(compassion)결여로 인해 그들은 백성들을 잃어갔으며 마침내 국가도 잃고 자신들마저도 잃어버리는 비운을 맞이한 것입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이 파국을 먼저 느끼고 보았기에 그토록 아파하고 경고의 예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레미아 예언자가 자신의 동포와 나라가 잃는 것을 아파하고,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보듬어 안으신 것처럼 오늘날 환경파괴로 인해 말없이 사라져가고 있는 생명들의 외침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억이 바로 참다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추석 때 우리가 자연이 선사한 음식을 먹으면서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이 음식을 먹어 온 조상이야기를 한 것이요, 우리의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조상들이 성취한 깊은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지구와 우주 이야기를 할 때, 이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과거가 오늘 우리의 현존 속에 다시 살아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구와 여기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우리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잘것없는 이웃, 보잘것없는 나라, 그리고 점점 사라져가는 보잘것없는 생물과 자원을 기억하고 다시 찾도록 기도합시다. 그것이 종국에는 나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서로 이어주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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