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몸의 치유, 영혼의 치유(다해 연중28주일)
작성일 : 2022-10-09       클릭 : 194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1009 다해 연중28주일

예레 29:1, 4-7 / 2디모 2:8-15 / 루가 17:11-19

 

 

몸의 치유, 영혼의 치유

 

코로나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았고, 심지어 어떤 분들은 생명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교인 분들 뿐만 아니라 제가 알고 있던 분들 중에서도 코로나에 걸려 고생하신 분들이 제법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코로나로 인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 중 한분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분 역시 코로나로 인해 몸이 무척 아팠다고 합니다. 그런데다 외부와 단절된 고립감으로 인해 심리적으로도 참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연세에 비해 사회적 활동이 왕성하셔서 마치 젊은이처럼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셨고, 하고 있는 일들에도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고 병마와 싸우면서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집착을 내려놓고 만족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병마와 싸우는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단순히 육체의 회복을 위한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육체회복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나병에 걸린 열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 사람들을 예수님을 보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 달라고 하질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병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병을 낫기 위해선 신의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입장에선 보면, 이것을 비과학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단지 육체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비과학적이거나 문명이 덜 발달한 미개한 것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육체와 물질적 측면만 중요시하는 유물론적 관념이 지배적인 현대인들에게 잊고 있던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나병환자들의 간청에 예수께서는 특별한 치유행위도 없이 그저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구약 열왕기 하권 5장에 나오는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의 나병치유이야기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 온갖 좋다는 약과 뛰어나다는 의사를 찾았지만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적국인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공문을 보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나병 같은 불치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냐면서 필경 시리아가 이걸 구실로 침략해 올 거라고 안절부절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 예언자는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하고, 엘리사에게 온 나아만에게 특별한 치유행위 없이 그저 요르단 강에 가서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그런 강은 시리아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이런 별 볼일 없는 강까지 굳이 올 필요가 있는가 반발하였지만, 결국 예언자의 말 대로 강물에 목욕을 하였고, 나병이 낫게 되었으며, 마침내 야훼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개종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이방인 장군 나아만에게 했듯이 예수님 역시 특별한 치유행위 없이 그저 사제에게 가라고만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공동체로부터 강제격리당하는 병이라 사제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회복선언이 있어야만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열 사람 모두 사제에게 가는 도중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요르단 강에서 목욕하고 나병이 나은 이방인 장군 나아만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분이라고 믿게 된 것처럼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7:19)”라고 선언하십니다.

앞서서 나병환자 열사람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절규하였고, 그들이 그 말의 깊은 뜻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낫게 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자신의 육체가 나았다는 그 사실에는 기뻐했지만, 그 영혼이 치유와 구원으로까지 가는 것은 간과했습니다. 오직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께 와서 이 놀라운 일을 이루게 하신 초월자 하느님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야말로 몸과 영혼이 모두 치유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왜 아홉 명은 이것을 못 깨달았을까요? 더욱이 이방인 사마리아인과는 달리 그들은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율법과 말씀을 배우고 자란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버릇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저의 과거경험과 연관됩니다.

저는 철없을 때 부모님이 해 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부모님의 도움이 제 기대와 요구에 못 미칠 땐 짜증을 내곤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식을 키우면서 그때 그런 저의 행동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짓인지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는지 회고해 보았습니다. 크던 작던 그런 분들의 자비에 힘입어 제가 성장하고 발전했기에 감사함을 느끼고, 그런 인연을 맺어주신 하느님의 자비하신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니까, 선생님이니까, 조직의 책임자니까, 그리고 궁극적으론 하느님이니까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저를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되질 못하게 막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나병이 낫게 된 아홉 명의 유대인들도 하느님이니까 당연히 자비를 베풀어 줘야 하는 것 아냐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한 차원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하느님의 말씀을 단지 인간의 들로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인간의 말로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 속에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신비가 담겨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제정하신 감사예배에 초대된 곳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피를 영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어 거룩해져서 다시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 디모데오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오가 사목하는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것을 신도들에게 깨우쳐 주시오. 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명령하시오. 그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파멸로 이르게 합니다.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서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2디모 2:14-1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고, 그 중 한사람이 와서 하느님을 믿고 찬양함으로서 온전한 치유를 받았듯이, 교회는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내려지는 곳입니다. 이 은총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행위를 통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몸과 영혼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치유와 구원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살리는 말씀으로 믿음이 깊어지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치유자이자 구원자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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