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실현된 종말(가해 사순5주일)
작성일 : 2023-03-26       클릭 : 12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326 가해 사순5주일

에제 37:1-14 / 로마 8:6-11 / 요한 11:1-45

실현된 종말

여러분은 ‘종말(終末)’이란 말을 들으실 때, 어떤 이미지 혹은 감정을 느끼나요? 국어사전에는 종말을 ‘계속되어 온 일이나 현상의 마지막’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개인에 적용하면대체로 죽음을 뜻하고, 국가와 민족에 적용하면‘망국’ 혹은 ‘멸망’을 지칭하기도 하고, 역사에 적용하면 인류의최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두다 회피하고 싶은 부정적이고 어찌 보면 무섭고 절망적인 이미지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종말(eschatology)은 이러한 ‘종결(ending)’만 있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시작(new beginning)’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과 ‘하느님나라의 도래’가 바로 새로운 시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 있어서 종말이란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고 세상이 새 창조(new creation)되는 희망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바로 이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제1독서 에제키엘서에서 언급하는 종말론은 개인이 아닌 집단,민족,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에제키엘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하여 일부 백성은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와 귀양살이를 하던 절망의 시대였습니다.어느 날 예언자는 기도 중에 들바닥에 널려있는 수많은 뼈들은 봅니다.이러한 환시는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생명의 에너지도 없는허무의 세계입니다.이것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자체 힘으로 다시 살아날 가망성이 완전히 없어진 절망이자 모든 것이 종결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이처럼 아무런 희망이 없는 시체더미에 뜻밖에 하느님 말씀이 들려옵니다.마치 “하느님의 기운(Spirit of God)”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듯이 말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죽은 민족을 다시 살리십니다.이리하여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고, 힘줄이 이어지고 살이 붙으며, 가죽이 씌어져서 사람 모양이 만들어집니다.그리고 에제키엘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에제 37:9)”라고 외치자,숨이 불어와서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저는 명상하면서 이 광경을 상상할 때,뼈들로 수북하게 쌓인 그 거대한 모습에 심한 절망을 느꼈지만,하느님의 숨이 사방팔방으로부터 와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눈을 뜨고 일어나는 모습에서 커다란 경이로움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에제키엘 예언자는 멸망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종말 속에서 민족의 부활과 새로운 창조를 미리 내다봤습니다. 그는 망국의 한을 품고 기도하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이 이 망한 민족을 다시 살리시는지 보고, 큰 위로와 희망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앞질러 ‘실현된 미래’를 내다본 예언자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예언을 합니다.

다음으로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복음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앞서 에제키엘 예언서가 민족의 부활을 말했다면, 복음은 라자로라는 개인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시에 라자로의 소생을 둘러싸고 주변의 인물, 특별히 두 명의 누이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뜻을 지닌 ‘라자로’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자매들은 빨리 오셔서 낫게 해 달라고 예수께 사람을 보냅니다.그런데 이 전갈을 받고도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이나 지체하십니다.그리고 라자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이걸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도 드러날 거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그때까지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한 제자들은 라자로가 있는 베다니아라는 동네가 예수님께 돌을 던질 정도로 굉장히 적대적인 유다 지방이라는 점을 들어 만류합니다.아마도 짐작컨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다로 가는 것과 그리고 그곳의 핵심지역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에 대하여 심한 반대를 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아직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었지만,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상은 그 옛날 다윗왕과 같은 군사와 정치적 메시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러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거나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예루살렘 지도층과 맞붙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 예수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러면 예루살렘 지배자들과 한번 용맹하게 싸워보자고 결연한 투쟁의지를 다짐니다. 토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11:16)”라고 외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 일행이 베다니아에 도착했을 때, 라자로는 이미 죽은 지나흘이나 되어서 무덤에 이미 묻혔고,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타는 마중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는 병고침을 받고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애석해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자, 마지막날에 부활할 거라는 뜻으로 이해한 그녀는 그 말씀에 동의하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시기로 한 구세주라는 것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고백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대한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부활과 생명을 믿는 이는 저승뿐만 아니라 이승에서도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이는 육체적으로도 죽더라도 새로운 형태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형태로 된 존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도 주님께서 부르시자 예수님께로 가서 언니와 똑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그리고 마리아를 비롯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 역시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성경에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장례식때 하는 애곡하는 의미로 ‘울다’라고 표현하는 반면에,예수께는 ‘눈물을 흘리다’라는 표현을 씁니다.그것은 단지 라자로가 죽어서 슬퍼서 울었다는 것을 넘어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연민에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연민의 눈물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바로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입니다.이 영화 후반부에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나의 하느님,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처절히 기도하실 때 성부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을 하십니다.그러나 비 한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눈물을 흘리십니다.’예수님의 이러한 눈물은 우리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의 눈물이자,어쩌면 당신이 십자가 상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때 성부 하느님의 눈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연민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만 멈추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옮깁니다. 예수께서는 돌로 닫힌 무덤을 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나타나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녀는 예수에게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행하십니다. 그분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십니다. 이리하여 죽었던 라자로가 소생합니다. 머지않아 성부 하느님이 성자 하느님을 죽음에서 불러내듯이 말입니다. 이리하여 종말이 실현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종말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이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믿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처럼 여전히 이 세상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오로지 당신의 능력과 은총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실 거라는 것을 다시 한번 믿으며 그러한 하느님께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건넵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한번 함께 걸을 겁니다. 그리고 온전히 부활하심을 경축할 것입니다. 그 고난과 영광이 교차하는 이 기간을 통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을 믿고 고백합시다.

라자로를 살리시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시길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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