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토마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해 부활 2주일)
작성일 : 2023-04-16       클릭 : 13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416 (가해 부활 2주일

사도2:14, 22-32 / 1베드 1:3-9 / 요한20:19-31

 

 

토마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1905년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중명전(重明殿)에서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과 함께 불법적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망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조약체결을 주도한 장본인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그러나 그는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아시다시피 크리스천이고 그의 세례명은 도마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세례명을 도마라고 했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도마가 인도에서 순교한 분으로서 훗날 동방의 사도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그리스도교가 비록 서양에서 온 종교였지만, 동방에서도 그 복음이 전해졌다는 역사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교를 서양만의 종교가 아닌 동양도 포괄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중국어 성경에 나오는 뚜오마(多马)를 한글 개역성경으로 번역할 때 우리 발음인 도마로 부르고 있고, 성공회는 공동번역에 있는 토마라는 명칭을 따르고 있으며, 천주교는 영어식 명칭인 토마스(Thomas)’로 부르고 있습니다. 부르는 말을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부활 두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는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부활 대축일 복음이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발현하신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부활 둘째 주일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토마사도와 예수님 간의 만남의 과정은 마치 우리 신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깊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 19:19, 26)입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에서 평화의 인사를 할 때,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의미가 갖는 각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완전히 이기시고,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포 속에 떨면서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스승을 추종한 제자들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부활의 기쁨보다는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련한 처지에 놓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평화를 기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가 전례에서 평화의 인사 예식을 할 때,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 것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서로 간에 미움과 다툼이 있으면 화해하라는 관계론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주님의 은총으로 초월하기를 바란다는 존재론적 차원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간의 평화는 물론이고,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님의 평화를 담아 내기엔 우리의 역량은 너무도 부족합니다.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19: 22-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길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을 이길 힘은 바로 죄의 용서입니다. 제가 지난 부활 밤 설교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교리가 담겨있는 신경(Creed)에 나타난 죄의 용서를 믿는다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사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사면할 때, 그것은 단지 죄의식을 털어버리는 심리적인 효과라기 보다는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시킨다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태초에 하느님이 첫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어 그들을 재창조하십니다. 성령강림으로 설립된 교회를 기념하는 성령강림대축일에 우리는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들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그 자리에 토마가 없었습니다. 그 후,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주님을 봤다고 하자, 그는 무조건 불신하기 보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 조건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도 그렇고 토마 역시 예수님의 몸에 집착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선생님하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요한 20:17참조) 어쩌면 육체라는 물질이 있어야만 살아있다고 여기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이건 너무나도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도 못할 뿐더러, 예수님처럼 영적인 몸으로 진화되지도 못했기 때문에 부활이 어떠한 차원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이런 토마에게 예수님은 그의 조건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다 보여주십니다. 이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십자가의 주님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그저 영광스럽게 부활한 신()만이 아니라, 동시에 고통스럽게 죽으신 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갖고 있는 독특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광의 신만을 믿고 찬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반쪽짜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광 속에서도 연민을 느끼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제 토마는 주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고백과 더불어 토마의 이 고백을 최고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각종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우리에게 주님은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처럼 나의 주님,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2독서 말씀처럼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9).

부활하신 예수님과 재회하고 뜨겁게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 사도의 그 믿음이 교우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길 소망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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