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8 강화선교 130주년 기념 교환예배(성공회 강화읍교회-감리교 강화교산교회) 에베소서 2:14-18 / 요한복음 17:6, 15-23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성공회와 감리교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회와 한국천주교는 『갈등에서 사귐으로(From Conflict to Communion)』라는 문서를 우리말로 공동으로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신교와 구교학자로 구성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 협의회 신학위원회’에 속한 저도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하면서 우리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단마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른 점이었습니다. 예컨대, 영어로 God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하느님으로 할건지, 아니면 하나님으로 할 건지가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서양언어로는 문제가 없는데, 우리말로는 서로 다르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달라서 되도록 하나로 하려고 했지만 하느님, 하나님과 같은 용어는 결국 병기해서 표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강화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회와 감리교가 교환예배를 합니다. 이 뜻깊은 예배를 준비하면서 저와 박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모르는 부분이 많았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저와 박 목사님과 같은 목회자들도 그럴진데, 일반 신자분들께서는 더더욱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선교 130년 만에 양 교단을 대표하여 두 교회가 서로의 다름을 체험하고, 그 다름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그 다양함 안에 현존하시면서 성령의 인도로 겉에 보이는 다름을 뛰어넘어 주님 안에 한 형제자매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은혜로운 예배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예배 때 낭독한 성경말씀을 정하면서 저와 박 목사님은 에베소서와 요한복음 말씀에 나타난 모든 것을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와 그 분의 기도를 교환예배에서 선포할 말씀으로 삼았습니다. 이 두 성경말씀은 일반적으로 교회일치주간 때마다 자주 봉독하는 말씀들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기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마음으로 느끼고, 이것을 실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묵상의 열매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한 복음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타 민족은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배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다인들로부터 극심한 배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직적인 측면에선 성부 하나님과 인간을 다시 이어줬을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측면에선 유다인이건 타 민족이건 지상에서 살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 안에 한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담한 주장을 합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구약의 율법들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율법조항과 규칙을 잘 지키고 그 공로로 시민권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서로 내가 너 보다 더 잘낫고, 내가 너보다 공덕을 더 많이 쌓았으니 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정의 와 사랑의 잣대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유한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보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다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주님 앞에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엄청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내적 연결고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그렇습니다. 나와 너가 다르고, 민족과 민족이 달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내적 에너지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지역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신분과 사는 형편이 다를지라도 우리를 근원적으로 한 집안의 형제자매로 엮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가 성령강림 때 생겨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즉 그것은 모든 차이와 다름과 심지어 적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모아 주시는 원동력이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이 사도 바울처럼 이 기쁜소식을 세상을 전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130년 전, 이 강화땅에 주님의 복음이 전해졌을 때도 이러한 성령의 불길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선조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130년 전 우리나라를 생각해 봅시다. 특별히, 이 강화도는 구한말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군의 포탄에 의해 크나큰 고통을 받은 상처받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것은 이러한 외세 앞에 나라의 위정자들은 무기력하기만 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데만 골몰하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마디로 목자없는 불쌍한 양들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갈등과 미움, 불안과 걱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화평의 진리는 커다란 마음의 위로이자 희망의 불씨와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우리의 전통가옥 안에 교회의 예배공간을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우리 신앙선조들은 사도바울과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의 증거자들로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러한 초기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열정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동시에 과거만 기념하기 위해 모인 자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서로 몰랐고 그래서 때때로 서로 오해했던 것을 인식하고 주님 안에서 다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해 바치신 기도를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다(요 17:15)”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십니다. 사실, 어떤 종교나 사상은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악하니 인간은 속세를 벗어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도피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심지어 교회역사를 보면 몇몇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기도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 저 세상에서 받을 보상을 위해 현세에서 꾹 참고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몇몇 지성인들은 기독교는 인간을 노예처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편이다라고 맹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기쁜소식을 증거할 때,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8-19)” 이 기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제자들은 파견되신 분의 파견된 이들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부터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것을 다시한번 말씀드리자면, 나 자신의 거룩함 그리고 교회의 거룩함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할 때 우리는 교만이라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것을 명심하고 복음을 전할 때 나 자신 나아가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선교는 교회가 주님의 거룩함으로 거룩해 질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하신 다음의 기도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여기서 거룩함의 목적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됨’입니다. 그 하나됨이란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 안에 제자들과 모든 믿는 이들도 들어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내적 결과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이 도달해야 되는 궁극적 목표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하나됨은 그저 믿는 이들끼리의 상통으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믿는 이들의 일치는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외적 결과로 이어저야 합니다. 곧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을 믿는 이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선교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들 안에서 보이는 것이요, 이 실천으로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130년 강화의 신앙선조들은 세례를 통해 거듭남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명을 받아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으려 했고,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바꿀 때, 서로 혈육이 다르지만 돌림 자(字)를 써서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의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강화교산교회 김상임(金商任)으로부터 신앙을 얻은 박능일(朴能一)이 그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이처럼 강화 초기교회의 신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그저 머리로 만이 아닌, 인생의 가치관을 바꾸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오늘날 강화 기독교 선교의 밑거름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신 하나됨을 모범적으로 행하신 훌륭한 모습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하신 일치의 기도, 그리고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바울이 설파하신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의 정신이 2,000년 교회역사 그리고 130년 강화선교역사를 관통하면서 모범적으로 계승하고 전달되어 왔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때도 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역사를 볼 때, 감리교와 성공회는 영국에 뿌리를 둔 한 형제자매였습니다. 감리교의 두 위대한 인물 John Wesley(1703~1791)과 Charles Wesley(1707~1788)는 모두 영국성공회 신부님입니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수많은 기독교 찬송가를 작곡하신 분으로 오늘날도 많은 교회예배에서 이분의 찬송가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경건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앙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경건한 신앙생활은 옥스퍼드 대학생 시절에도 계속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분들과 이분들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규칙주의자들(Methodists)'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이 조롱한 십자가가구원의 표지가 된 것처럼 Methodist라는 말은 감리교(Methodist Church)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회심 전 사도 바울처럼 교회규칙에 철저히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2%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에 대한 강한 체험과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에게 1738년 5월 24일에 커다란 회심체험을 해 주십니다. 요한 웨슬리의 이 체험은 마치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했던 체험과도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후 요한 웨슬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이 내 교구이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실로 파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오늘날 선교학에서 보면, 교파를 막론하고 다 받아들이는 주장이고 실천방법이지만, 18세기 영국 아니 그 당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급진적인 선교이자 목회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의 성공회, 독일의 루터교와 같은 이른바 국가교회 시스템에서는 교회가 오늘날 행정기관처럼 출생, 결혼, 사망 등을 관리하였고, 각 지역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관할지역에서만 목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많은 이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 살게 되어 도시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보고 싶어도 그들이 원래 속한 지역이 시골이기 때문에 교적부를 옮기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가 당시에는 노동시간이 길어서 노동자들이 교적부를 옮길 시간도, 예배참석하러 교회갈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요한 웨슬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고 설령 교회건물이 없더라도 야외에서 설교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