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사건과 해석 그리고 실천(성탄대축일)
작성일 : 2021-12-25       클릭 : 32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다해 성탄대축일

이사 52:7-10 / 히브 1:1-4 / 요한 1;1-14

 

 

사건과 해석 그리고 실천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우발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운전 중에 가벼운 접촉사고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계기로 새로운 직장에 일하게 되면서 내 인생방향이 달라지는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난날을 회고할 때, 그 사건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러한 패턴은 학문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역사학에서 연구자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연구할 때, 그 사건자체에 대한 팩트 체크라는 분석 못지않게,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대한 연구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마다 그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역사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서도 하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느낌과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과 예술, 그 밖의 학문들은 풍요로워 질 수 있습니다. 신학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하느님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과 거기에 담긴 다양한 사건과 인물 그리고 이야기들에 대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설교를 비롯한 수많은 신학이론, 음악과 미술, 여러 가지 예배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어제 밤부터 오늘 낮까지 우리는 성탄 전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탄이란 하나의 사건에 관하여 성탄 전야 때 읽은 복음말씀과 오늘 읽은 복음말씀은 다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오와 루가 복음은 족보부터 시작해서,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탄생을 고지하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베들레헴 말구유에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리고 하늘에 나타난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몰려온 목동들, 그 후 별의 인도로 방문한 동방박사들, 이를 알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로데와 이집트로 피신한 예수님 가족 이야기 등. 마태오와 루가복음저자는 예수님 탄생과 연관된 여러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묘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에 대한 영성적이고 신학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방금 경험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전해주는 것에 집중했다면, 요한은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해석하는 것에 무게들 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태와 루가복음의 성탄과 요한의 성탄에 대한 서양말의 표현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말 번역도 다릅니다.

영어로 ‘nativity'탄생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정관사 the와 첫 글자 N을 대문자로 바꾸서 the Nativity라고 하면, ‘예수탄생혹은 성탄을 뜻합니다. 어제 밤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이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들은 복음은 영어로 the Incarn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신학전문용어로서 우리말로 육화(肉化)’, ‘성육신(聖肉身)’으로 번역합니다. 그것은 원래 '~안에', '~안으로' 라는 in살덩어리라는 caro라는 라틴어 단어가 결합된 말로 살 안으로 들어옴이란 뜻입니다. , 요한복음저자는 성탄을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살과 피가 되셨다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걸음 좀 더 들어가 보자면, 육화와 성육신이란 용어 외에 강생(降生)’이란 단어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어 구원에 필요한 모든 임무를 완수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Ascension)'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강생이란 단어 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심만 보지 말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이라는 구원의 전 과정을 총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성탄을 경축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탄사건을 육화, 혹은 성육신, 또는 강생 등 여러 용어로 해석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월자이시고 전능하신 존재가 왜 우리와 같은 유한한 존재가 되신 것인가입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째, ‘평화(平和)’입니다. 1독서는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이사52:7)”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탄으로 절망과 비탄에 빠진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무너진 곳이 다시 세워지는 그런 평화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둘째, ‘생명(生命)’입니다. 요한복음저자는 태초부터 모든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우리가 어둠에 갇혀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 말씀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와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십니다. 이로서 우리는 다시 생명을 찾게 됩니다.

셋째, ‘알음입니다. 위에 언급한 평화와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이시며, 우리는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분이말로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히브 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 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오심은 잃어버린 우리의 평화를 회복시켜 주시고, 어둠 속에서 꺼져가는 우리들에게 빛을 밝혀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되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어제 밤 우리는 지옥 같은 이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오신 아기예수님을 경축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러한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하고 그 의미를 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로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절망 중에 위로해 주시고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주실 평화의 왕,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감사성찬례를 통해 예수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다시금 고백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 각자는 예수의 살과 피를 우리 몸 안에 모십니다. 예수님의 육화’, 예수님의 성육신이 이제 나의 육화’, 나의 성육신이 됩니다. 사도 바울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씀하셨던 그 고백이 우리각자의 신앙으로 체화됩니다. 그리고 사제는 파송예식 때 나가서 평화를 이룹시다라고 선포하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아기 예수가 가져오신 평화와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땅에 평화와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탄에 그 분의 길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실천하셨던 아시시의 성프란시스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로 저의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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