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두 가지 변모: 중독과 희열(다해 사순2주일)
작성일 : 2022-03-13       클릭 : 294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313 다해 사순 제2주일

창세 15:1-12, 17-18 / 필립 3:17-4:1 / 루가 9:28-36

 

 

두 가지 변모: 중독과 희열

 

하나의 단어가 사용하는 분야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를 띄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ecstasy(엑스터시)입니다. 종교심리학에선 이 말이 무아(無我)의 경지, 탈혼(脫魂) 등 신비한 초월체험을 뜻하지만, 의학에선 황홀한 환각, 심지어 마약이름으로도 사용됩니다. 원래 이 말은 “(어떤 상태)밖으로 서 있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κστασις(엑스타시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용하는 곳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갖는 이유는 엑스터시가 일상적인 우리생활 영역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현상임과 동시에, 이 체험을 통해 우리가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변모(transfiguration)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이 말은 대략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데, 첫 번째 뜻은 놀라움, 당황, 혹은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뜻은 무아지경, 황홀경을 뜻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황홀경'상태에서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보았고(사도 10:10),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 가운데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었다(사도 22:17)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야훼 하느님을 만날 때도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동일한 현상을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51절을 보면,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라고 하고 있고, 12절에서도 아브람이 야훼 하느님의 지시대로 번제물을 준비하고 계약을 맺기 위해 기다리던 중, 신비경에 빠져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동안에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실 때, 제자들이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모습을 본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그들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신비체험인 엑스터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3절에 그들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자기들도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차원을 접하였기에, 자신들의 의식 밑에 깊이 잠재된 무의식에서 나온 말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무아지경, 황홀경 혹은 희열(喜悅)등으로 번역하는 엑스터시는 성서뿐만 아니라 2000년 교회역사를 통해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체험을 통해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깊이 느끼면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나라가 주는 참된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엑스터시 체험은 그 강렬함 못지않게 위험성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과 메시지가 없이 단지 엑스터시 그 자체만 있다면,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이 아닌 무속이나 기타 영적현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신비체험은 반드시 성경말씀과 교회전통에서 식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영성에선 '영의 식별(Discernment of spirits)'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러한 식별이 없이 엑스터시 체험을 했다고 무조건 하느님 체험이라고 하면, 자칫 영적교만으로 빠질 수 있으며, 교회 내 분열을 가져올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엑스터시 내지 성령체험과 같은 신비체험과 더불어 성경공부와 꾸준한 기도생활과 전례참여라는 일상훈련이 조화를 이루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초월성과 만나는 것은 영성과 신앙여정에 있어서 매우 강렬하며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독특한 신비체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신비체험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이러한 신비체험은 온전히 하느님이 주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 안에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 혹은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1독서에서 야훼 하느님은 고향땅을 떠나 낯선 땅에서 불안해하는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을 보여주시며 희망을 주실 뿐만 아니라, 황홀경에 사로잡힌 아브람이 준비한 번제들 사이로 연기와 횃불로 지나가시면서 그의 후손에 대한 앞날과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온전히 하느님이 주시는 큰 은총입니다. 또한 복음에서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불안해하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거룩함을 드러내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지극한 복락을 잠시 맛보게 해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제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해주십니다.

둘째, 신비한 체험은 우리일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신비체험 전에 아브람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예배 때 바칠 번제를 준비하는 전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고난을 예고하시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비체험은 평상시 우리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출현합니다.

셋째,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은 나약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격려하고, 희망을 줍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는 아브람은 야훼 하느님과 신비하게 만남으로써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걷게 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말로만 듣던 모세와 엘리아를 신비하게 만남으로써 예수님께서 평소 하신 말씀과 기적이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건지 체험하고, 이것이 훗날 그들에게 닥칠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무의식 연구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현대인은 신()을 잃은 대신 증상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현대에 만연한 중독(中毒)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영적 엑스터시와 달리 알콜중독, 마약중독, 일중독, 섹스중독 등 온갖 중독은 신을 상실한 우리시대의 병든 엑스터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독은 일종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독은 중독대상을 궁극적 관심으로 삼고 거기 사로잡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독은 하느님 대신 등장한 증상이며, 하느님의 대체물로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우상이요, 거짓 신인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진짜 신, 참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 희열, 영적 엑스터시는 온전히 하느님과 당신의 영이 주도하시기에 우리가 원한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영성은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이 신비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기도입니다. 특별히 명상기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상상력을 동원해 복음의 장면에 들어갈 수 있고, 거기서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꿈에 대한 성찰입니다. 성경에는 적지 않은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날 정신분석학에서 꿈은 다양한 상징을 통해 내 의식 밑바닥에 있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무의식과 만나고, 이 꿈을 이해하면 숨겨져 있던 자신의 단면과 만나게 됩니다. 또한 때때로 꿈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례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아브람이 하느님께 드릴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 중에 하느님과 신비하게 만났듯이,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이 감사성찬례 역시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가 이루어고 있습니다. , 우리는 면병을 그리스도의 살로 먹고, 술을 그리스도의 피로서 마심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그 순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신비로운 예식에 참여합니다. 세상은 이 신비로운 예식을 그저 한낱 예식에 불과하다고 치부할지 모르나,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이 예식을 통해 예수님과 일치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이룬 예수님과의 일치를 세상의 바쁜 일상으로 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일주일 후 다시 이 자리에 모여 그 일치를 또다시 재현합니다. 마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더니 부활함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감사성찬례는 사물을 자기 멋대로 휘고, 구부리며, 지배하는 마술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어지고, 잠시나마 두 세계가 하나됨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변모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 2주일입니다! 오늘 아브람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한 영적희열, 그리고 야훼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이야기를 듣고 신앙의 위안과 희망을 가집시다. 또한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유한한 것에 탐닉하고 중독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즐거움과 행복으로 영적 충만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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