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평범함 속에 있는 비범함(다해 주님의 세례축일)
작성일 : 2022-01-11       클릭 : 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109 다해 주님의 세례축일

이사 43:1-7 / 사도 8:14-17 / 루가 3:15-17, 21-22

 

 

평범함 속에 있는 비범함

 

 

종교를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묶다라는 라틴어 동사 religare다시 모으다라는 religer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religion은 타락한 인간을 신에게로 모으고 다시 연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宗敎)’란 단어는 서양언어 religion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으뜸 되고 근원적인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종교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의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양쪽 모두 거룩함(holiness)과 성()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이 신과 다시 연결되고 그러한 근원적인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선 일반적인 것들과 뭔가 달라야 하고, 그러기에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일반적인 시간과 구별된 특별한 시간을 정하거나, 혹은 어떤 장소나 물건을 일반적인 장소와 물건 등과 구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23절에 나오는 주일의 제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로 인간은 주일이라는 거룩한 시간을 정해서 시간의 주재자이신 하느님께로 다시 모여(religere)’, '으뜸 되는 가르침(宗敎)'에 참여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맛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거룩한 것은 일반적인 것과 떨어질 수 없으며 그 일반적인 것이 있어야 존재가 가능합니다. 예컨대 만일 7일이란 날이 없으면 어떻게 거룩한 하루가 생길 수 있겠으며, 일반건물이나 공간이 없으면 어떻게 거룩한 건물과 공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함이라는 특별함은 일상이라는 평범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성사(聖事)’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태어남을, 성체성사를 통하여 먹고 마심을,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장과 성숙을, 혼배성사를 통하여 사랑과 가정의 소중함을, 고해성사를 통하여 회개와 용서를, 신품성사를 통하여 직업과 소명의 성스러움을, 조병성사를 통하여 치유의 은총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신성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처럼 7성사라는 특별한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에 담겨있는 비범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오늘은 7성사 중에서 세례성사의 원형이 되는 주님의 세례축일입니다. 전례력에 따라 올해 우리는 루가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세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의 세례에 관하여 마태오, 마르코, 루가 모두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에선 세례자 요한의 세례 장면과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 사이에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한테 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래서 루가복음만 보자면,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직접 세례 받으셨는지, 아니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을 따르던 그의 제자로부터 세례 받으셨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다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직접 세례 받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받으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루가복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한테 세례받으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하고 성부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행한 세례예식에 참여하셔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신 걸까요? 이걸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유다상황이 어떠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방대한 자신의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일정정도 각 지역 식민지의 풍습을 용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들의 종교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그 가문들은 헤로데, 로마총독 등과 정치적 야합을 하고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 사제와 같은 지방의 사제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매년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각종 종교예식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율법규정 때문에 평범한 유대인들은 크나큰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경건한 유대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목욕하러 자주 다니던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통한 정결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예루살렘 대성전의 종교적 독점과 경제적 착취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겨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지만, 예루살렘 지배층한테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그 추종자들이 벌인 세례에 참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역시 당시 종교적 진정성을 잃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사제집단들을 비판적으로 보신 것을 뜻함과 동시에 야훼 하느님과 맺은 참된 계약의 정신을 되살릴 결심을 하신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지향하셨던 이스라엘의 참된 종교전통은 무엇인가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들은 것처럼 그것은 해방하시는 하느님이 당신백성을 다시 되찾음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전통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당신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느님께서 유다왕국 멸망 후, 바빌론 귀양살이하는 그들을 다시 한 번 되찾아 오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북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어서 내놓아라’, 남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잡아두지 말라.’ 아무리 먼 데서라도 나의 아들을 데려오너라. 땅 끝에서라도 나의 딸들을 데려오너라.”(이사 43: 6)

 

이처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운동은 당시 이스라엘 대사제들이 종교적으로 억압하는 잘못된 전통을 바로 잡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위상을 복원하는 신앙회복운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했던 세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이스라엘 민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한다는 점입니다. 2독서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듣고 ……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로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사도 8:14-17)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이스라엘 민족이란 혈육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세례 때 내려오신 성령이 사마리아 이방인을 시작으로 이제 온 세상 사람에게 임재합니다. 이리하여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세례를 매듭짓고 신약의 세례를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시대 세례의 은총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여러분!

사람들은 자주 몸을 씻으며 육신의 청결을 유지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요르단 강은 당시 사람들이 몸을 씻으러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일상의 공간에서 세례자 요한은 거룩한 세례운동을 전개하였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부와 성령이 신성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하고 거룩함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앞에서 7성사의 의미를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룩함은 평범함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비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없으면 그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거룩함과 비범함은 우리와 동떨어진 저 멀리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 즉, 우리가 만나는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우리주변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신비함과 거룩함, 비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내려오시며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린(루가 3:21-22)” 것처럼 말입니다.

평범함과 관련하여 연말연시 서울 강남구 코엑스 미디어 아트에서 상연하고 있는 짧은 동영상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2201 coex artium.mp4

 

방금 본 영상처럼 2022년 새해에 코로나가 종식되고, 일상의 평범함이 회복되길 희망하면서, 우리 신앙생활도 성령의 능력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거듭 새로워지기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베드로 22-01-11 28
다음글 베드로 22-01-01 19


묵상 영성 전례 옮긴글들
이경래 신부 칼럼 김영호 박사 칼럼

홀리로드 커뮤니티

댓글 열전

안녕하세요?선교사님!
정읍시북부노인복지관 멸치 판매..
원주 나눔의집 설명절 선물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