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6 다해 연중2주일 이사 62:1-5 / 1고린 12:1-11 / 요한 2:1-11 궁즉통, 통즉변, 변즉구 동양의 고전 『주역』에 보면, “궁즉통, 통즉변, 변즉구(窮卽通, 通卽變, 變卽久)”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막다른 곳에 이르면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변하게 되고, 변하게 되면 오래간다”라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가나의 혼인잔치’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주역의 이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전개가 마치 주역의 3단계처럼 발전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 바로 이어서 나온 장면이 오늘 복음인 예수님 고향 갈릴래아에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일입니다. 오늘날도 동네에서 마을잔치가 벌어지면 주방일은 동네 어머니들이 주로 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사셨던 곳도 우리와 비슷한 풍경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잔칫집에 남성들보다도 여성들이 음식이며 여타 행사진행사정들을 더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혼인잔치주인은 예상보다 많이 온 하객들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내심 당황하였고, 즐거운 잔치분위기에 행여나 술과 음식이 떨어지는 낭패가 생길까 애만 태우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포도주의 경우 오늘날이야 가게 가서 사 올 수 있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오랜 시간 동안 숙성해서 만들어 놔야 하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즐거운 잔치분위기가 확 뒤바꿔질 수도 있는 참으로 막다른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주방 상황을 알게 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위기를 해결할 사람은 아들 예수뿐이라는 것을 알고,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와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궁즉통(窮卽通)’, 즉 궁하게 되었을 때 통하게 되는 과정이 잔치집 주인에서 성모 마리아에게로,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서 아드님 예수에게로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아직 어머니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 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대목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일렀다(요한 2:5)”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요한 2:7)”라고 지시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선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대하여 어머니와 아들 간에 그 이상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지 않아서 왜 이렇게 반전이 되었는진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처음 어머니가 딱한 사정을 알게 되어 그 안타까운 마음을 아들에게 전했지만, 그 마음이 처음에는 아들 예수에게 즉시 연결되지 않았으나, 아들 역시 어머니의 행동을 보면서 잔치집 주인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지 점차 느끼고 되었고, 마침내 이심전심 통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제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이 통하게 되니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한(요한 2:8-9)” 것입니다. 이리하여 ‘통즉변(通卽變)’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막혔던 것이 뚫리게 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이 맛있는 포도주로 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술맛을 보고나서 신랑을 불러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하고 감탄(요한 2:9-10)”합니다. 흥겹고 즐거운 잔치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물이 변화되어 포도주가 되고, 걱정이 변하여 기쁨이 된 가나의 혼인잔치가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변즉구(變卽久)’가 일어났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반기신다(이사 61:5)”라고 말씀하셨듯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다보면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처럼 아무리 경사스런 일이 일어도 그 속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난관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스런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이 곤궁하여 등록금 마련이 여의치 못할 때, 또는 신기술 개발로 특허를 따내서 성공할 가능성이 생겼지만 사업자금이 부족하여 발만 동동 구르는 것처럼 우리인생은 자주 궁하고 막힐 때가 생깁니다. 그럴 때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일종의 지혜와 영감을 줍니다. 첫 번째 측면은 기도와 마음자세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성모 마리아는 먼저 그런 상황을 접하고 ‘공감(compassion)’했습니다. 그런 다음, 아들 예수님과 소통하고 '공유(communion)'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분 사이에 ‘신뢰(trust)’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신앙생활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주님께 간구하거나 혹은 내가 겪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전할 때, 거기엔 깊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부족할 때, 나는 기도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과 불신감이 남아 있어서 주님과 온전한 공유와 소통이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공유와 소통이란 영어단어 communion은 우리전례에서 ‘영성체’로 번역하고 있는데, 저는 주님의 몸과 피를 내 몸에 모시는 물리적 행동을 통하여 영적으로도 주님과 뜻을 공유하고 소통한다는 communion이란 서양 말이 영성체라는 단어보다 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전례에서 사용하는 communion을 ‘통(通)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이것을 일상생활로 확장해 보면, 서로가 신뢰할 때 소통이 일어나고 마침내 서로 통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두 번째 측면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아무리 나와 하느님이 통했다 하더라도, 기도를 통해 얻은 결실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공허하게 됩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예수님이란 인간존재로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교가 설파하는 하느님 사랑이 그저 추상적인 담론에 지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의 행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들을 무한신뢰하신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움직이고, 하인들이 움직이고, 마침내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우리 각자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와 행동과의 관계에 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여,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대박 이루게 해주세요.”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자, 그는 “주님,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데요!”라고 기도하자 주님께서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너 복권은 샀느냐?”하고 반문하셨답니다. 기도를 비롯한 신앙생활도 그렇고, 일상생활도 그렇고 행동이 동반되지 않으면 ‘기적’은 단지 우리 생각 속에만 머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행동합시다. 그런데 행동할 때 용기 못지않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우선 내가 어떠한지 아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소개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셨기(1고린 12:11)” 때문에 우선 내가 잘 할 수 있는 선물과 능력이 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기쁘게 잘 감당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치 혼인잔치에서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인들이 있었고, 변화된 포도주를 마시고 놀라고 기뻐하는 하객들이 있었기에 그 잔치가 풍성해졌듯이 말입니다. 이때 내가 맡은 역할이 내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시기(1고린 12:4)” 때문입니다. 특별히, 교회가 마음과 뜻을 모아 일할 때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가르침을 소홀히 하면, 교회 구성원들이 좋은 일을 하고도 분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당시 성령이 충만하지만 교인들 간 은사문제로 분란에 빠진 고린토교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은사는 성령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이 원칙을 잘 준수하고 행동할 때, 우리교회가 행하는 모든 기도와 행동이 서로 통하고, 그래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그 변화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게 됩니다. 2022년 대림과 성탄시기를 지나고 일상을 상징하는 연중주간을 맞이하면서 사도바울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고 각자가 받은 은사를 잘 가꾸고, 동시에 상대의 은사도 존중하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가나의 혼인잔치’이야기처럼 우리교회도 즐겁고 기쁜 하느님 나라 잔치가 늘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며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