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사건 속에서 기도하기(다해 연중12주일)
작성일 : 2022-06-19       클릭 : 23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619 다해 연중12주일

열왕 상 19:1-16 / 갈라 3:23-29 / 루가 8:26-39

 

 

 

사건 속에서 기도하기

 

모든 종교에서 기도는 가장 본질적 요소 중 하나입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어떤 면에서 진정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우리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어사전에는 특별히 어떤 것을 청하거나 감사드리기 위하여 신()과 하는 대화라고 하고 있고, 우리말 사전에는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 볼 때, 기도에는 기도하는 주체인 와 그 대상인 초월적 존재인 사이에 청원과 응답 그리고 감사가 오고가는 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이러한 기도는 아무 것도 없는 순백의 진공상태 혹은 영혼이 온전히 거룩해진 초월된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온갖 사건들 속 한 가운데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도의 영적훈련을 거쳐 상당한 수준의 영적각성 상태에 다다른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부딪히는 각종 사건과 관계들 속에서 걱정과 기대,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하느님과 대화하고 기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는 온실 속에서의 기도가 아니라 사건들 속에서, 달리 표현하면 거친 들판 한 가운데 피어있는 야생화들이 드리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드리는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은 이스라엘이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있을 때, 엘리야 예언자가 왕을 꾸짖고 바알신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을 불러 모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신을 섬길 것인지, 야훼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양쪽 모두 제단을 쌓고 어느 신이 진정한 신인지 가리자고 합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들이 소리치며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 혼자 야훼께 기도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은 바알신앙을 버리고 야훼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이사벨 왕비는 엘리야 예언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 예언자는 황급히 도망칩니다. 너무 급하게 나온 나머지 제대로 음식도 챙기지 못한 그는 사경을 헤매지만, 하느님의 안배로 간신히 동굴로 몸을 숨깁니다. 이스라엘 개혁의 선봉장으로 급부상한 엘리야 예언자는 하루아침에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곤란한 상황이 복음에도 펼쳐집니다.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인 게르게사 지방에서 어떤 사람이 악령에 사로잡혀 심한 발작을 하는 바람에 그는 사람들에게 추방되어 광야를 헤매며 고통 속에서 지냅니다.

엘리야 예언자도 그리고 마귀 들린 사람도 결국 사람들로부터 배척되어 심한 고독과 생명에 대한 위협 속에서 하느님과 만납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격렬한 사건 한복판에서 초월자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과 해후합니다. 이제 그들이 하느님과 어떻게 대화하며 기도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엘리야 예언자와 하느님과의 대화를 봅시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말을 건네십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 일들로 인하여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께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현재 내가 어떤 사건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리고 거기서 영향 받은 나의 감정은 어떤 건지 하는 자기이해혹은 자기인식입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와 만나서 진찰할 때 주고받는 대화와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나서 하느님은 이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그를 동굴 밖으로 나오라고 인도하십니다: 앞으로 나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열왕상 19:11)” 그리고 당신을 느껴보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동굴 입구에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처음에는 산을 흔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한줄기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지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느님 현존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길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격정들이 사라지자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제야 그는 그 조용한 소리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성, 특히 기도 중에 하느님과 어떻게 만남을 하는지에 대한 깊은 영적통찰을 줍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받은 수많은 감정과 생각 덩어리로 가득 찬 캄캄한 마음의 동굴 속에 갇혀 하느님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감정과 씨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가치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 영성에선 정화(淨化)의 단계라고 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선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격정과 온갖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정화해야 합니다. 불길, 지진, 강한 바람과 같은 현상은 외부 자연현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엘리야 예언자 내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치유와 정화과정이 지난 후, 조용한 마음의 상태에 처하자 그는 하느님을 그 자체로 대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성경에선 동굴어귀로 나왔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 뜻은 묶여있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하느님을 그 자체로 만나서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묻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열왕상 19:13)” 처음에 물으셨던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도 앞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얼핏 보면, 처음이나 끝이나 별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변상황은 그대로 이지만, 이를 대하고 받아들이는 엘리야의 감정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극단적인 분노와 좌절로 자신만의 동굴 속에 웅크려있지 않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갈 내적인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그에게 사람들 사는 성으로 가서 새로운 왕과 뒤를 이을 예언자를 세우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다시 세상 속으로 갑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기도의 열매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악령 들린 사람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봅시다. 이 대화의 초반부에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루가 8:30)”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의 외적인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에서 그를 괴롭히는 그 정체가 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기도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 원하는 것을 빕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함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 안에 있는 나의 또 다른 욕망이 원하는 것인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서서 엘리야 예언자와 주님과의 대화에서 먼저 자기이해혹은 자기인식이라고 한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먼저 기도를 하는 내가 누군지, 어떤 마음인지 살펴보라고 묻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의 내면을 보게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에선 이것을 군대처럼 많은 마귀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선 이에 대하여 다중인격 혹은 다양한 심리적 자아분열이라고 진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심령학에서 말하는 악령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심령학이건, 아니면 정신의학과 심리학적 분석이건 중요한 것은 그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입니다. 복음은 이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그는 성장 과정 중 어떠한 정신적 충격으로 마음과 영혼이 상당히 피폐해 졌고, 급기야 사회로부터 격리된 외톨이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가 동굴 속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그는 광야를 방황하면서 이 질곡에서 풀려나길 바랐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엘리야처럼 하느님을 찾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 정도로 영적인 힘이 완전 고갈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상태를 잘 아시고 그를 질곡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그는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풀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라(루가 8:39)”고 사명을 주십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마귀나 다른 무엇에 쉽게 의지하는 습성을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그에게 주체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튼튼한 영적 강건함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결과는 각 사람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실 때 주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어쩌면 엘리야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아픈 상처를 토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악령 들린 사람처럼 나를 옥죄고 있는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 앞에서 체면치례하지 마시고 의사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말하는 환자처럼 주님께 여러분의 내면을 다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엘리야처럼 주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과 좀 더 깊은 만남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주님은 거기서 여러분의 참 자아를 찾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쩌면 때때로 주님은 감정의 실타래에 묶여 힘들어 하는 나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힘과 사명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이 기도가 우리 신앙인에게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몸(갈라 3:28)”이 되게 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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