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광야에서 풍요로운 땅으로(가해 대림2주일)
작성일 : 2022-12-04       클릭 : 147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1204 가해 대림2주일

이사 11:1-10 / 로마 15:4-13 / 마태 3:1-12

 

광야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초대교회시기 신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유대교를 믿는 동족들의 핍박과 로마제국과 유대인들 간 긴장이 높아짐에 따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각 지역에 흩어지면서 점차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이들은 혈통으로는 유대인이거나 혹은 부모 중 한쪽이 다른 민족이라서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른바 다문화 가정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말보다는 그리스말이나 라틴말을 더 편하게 구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말로 쓰인 유대교 경전을 읽으며 유대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00% 유대인이 되었건, 다문화 가정 유대인이 되었건 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새 이스라엘’, 더 나아가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드러냈고, 결과적으로 유대교 경전을 옛날 계약, 구약성서(Old Testamen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로마 15:12)”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서가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 그날,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은 만민이 쳐다 볼 깃발이 되리라.(이사 11:1, 10)”

그런데 사실,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이새의 그루터기에 나온 새싹은 당시 유대왕국의 히즈키야 왕을 지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왕국의 정체성을 바로잡고자 종교개혁을 해서, 이방풍속과 미신을 척결하고 순수한 유대종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히즈키야 왕에 대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들은 제1독서의 내용을 선포하면서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될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후세 역사는 히즈키야 왕 말년에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고, 주변강대국의 계속되는 침략과 압박으로 히즈키야 왕 사후, 유다왕국은 국력이 점차 쇠락해가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 후손들, 특히 초대교회 시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서의 이 예언이 참된 이새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준 '예형(type)'이자 '전조(foreshadowing)'라고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새(Jesse)'는 다윗왕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났다'는 말은 다윗왕의 후손이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사야 예언자가 지목한 사람은 히즈키야 왕이었지만, 사도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분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해했고,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진정한 다윗의 후손이자, 이사야 예언자가 희망했던 이상(理想)을 실현하러 이 세상에 오신 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킬 분이 오기 위하여 그 때를 미리 알리고 준비해야 할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 고행을 하면서 거친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회개하러 그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태어난다(重生)’는 의미로 세례를 베풉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 본 미래 모습과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광야 현실입니다. 두 광경은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분이 다스리는 곳은 늑대와 새끼양이 어울리고 ……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이사 11:6-9)” 그야말로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라고 예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염원하는 인류의 유토피아(Utopia)이자,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말하듯이, 이것은 아직까지 실현된 적이 없는 우리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세례자 요한이 활동한 광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결핍된 곳입니다. 그러기에 생존을 위해서 격렬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또한 광야는 나의 한계를 절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 때로는 무모한 유혹에 사로잡히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3가지 유혹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께서는 빵의 유혹, 명예의 유혹, 그리고 권력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빵의 유혹을 받으셨다함은 광야가 먹고 살기 지극히 힘들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고, 명예의 유혹을 받으셨다함은 광야의 적막함이 우리를 철저히 고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유혹을 받으셨다함은 광야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남보다 더 인정받기 위해, 남보다 더 큰 힘을 갖길 위해 발버둥 칩니다. 이처럼 광야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역설적으로 이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으니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라고 합니다. 이사야의 메시지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지만, 거기에 좌절하거나 갇히지 말고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봤던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로 갈 힘을 갈망합니다. 세례는 바로 광야라는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로 넘어가는 중요한 첫 관문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우러르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아직 형성되기 전인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과 같이 이방인 피가 약간이라도 있는 다문화 가정유대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터부시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유대인들만이 하느님나라의 이상을 향유할 수 있다는 선민의식(先民意識)’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협소한 생각을 세례자 요한은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바울 역시 세례요한이 말한 이 정신을 선교의 핵심으로 삼고 모든 민족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2주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외쳤던 광야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척박한 삶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아직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했던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인정받고 싶고, 힘을 갖고 싶은 양육강식이 난무하는 광야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현실에 갇혀 살 순 없습니다. 탈출해야 합니다. 그 광야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으로 가서 물로 몸을 씻고, 목을 축여서 갈증을 해소해야 합니다. 전례언어로 세례는 우리가 광야에서 탈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첫발걸음을 내딛는 상징입니다. 또한 이것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회심입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인들은 아브라함을 혈육의 조상보다 더 위대한 영적인 조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대림2주일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평화가 충만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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